본문 바로가기

소수 민족의 전통의상

페루 케추아족의 모자와 치마의 계층 표현

안데스 산맥과 케추아의 삶

페루 케추아족의 전통의상은 해발 3,000미터를 넘는 고산지대의 생존 환경과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형성된 복식 문화가 중첩된 결과물이다. 안데스산맥의 척박한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중심의 삶은 단순히 의복의 기능에만 그치지 않고, 각기 다른 계층과 역할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케추아족은 잉카 제국의 후예로, 언어와 전통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대표적인 원주민 집단이다. 이들이 착용하는 전통의상에는 단지 예쁜 천이나 장식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특히 여성들의 복식은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을 반영하며, 그들의 삶을 읽는 중요한 문화 코드로 기능한다. 이러한 복식 가운데 모자와 치마는 단순한 의복이 아닌 '소속과 위계'의 상징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케추아족의 의상이 화려한 색상과 정교한 직물로만 인식되지만, 실은 계층 구조가 그 섬세한 짜임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왜 같은 치마인데도 색이 다를까?”, “모자는 왜 모양이 이렇게 다르지?”라는 질문은 단순한 디자인 차이를 넘어, 공동체 내에서 어떤 역할과 지위를 지녔는지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언어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그 모자와 치마에 담긴 상징 체계와 계층 표현 방식을 탐구하며, 케추아족이 살아온 문화적 역사를 복식이라는 렌즈로 함께 들여다보고자 한다.

 

형태로 계급을 나눈다 – 모자의 종류와 의미

페루 케추아족의 전통의상 중 모자는 단순한 방한용이나 장식품을 넘어서, 혼인 여부, 경제 수준, 나이, 심지어 어느 지역 출신인지까지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복식 요소다. 케추아 여성들이 착용하는 전통 모자, ‘몬테라(montera)’는 평평하거나 둥글고 넓은 챙이 있으며, 때론 붉은 리본이나 자수로 장식된다. 특히 쿠스코 지방에서는 유부녀들이 챙이 넓고 장식이 풍성한 몬테라를 착용하는 반면, 미혼 여성은 상대적으로 단순한 형태의 모자를 쓴다. 이는 공동체 내에서 상대를 구분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결혼 상대를 알아보는 실용적 기준이기도 하다. 일부 지역에서는 모자 위에 덧씌우는 천의 색깔이나 자수의 수량이 가족의 재산 수준을 암묵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즉, 모자는 신분증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또한 종교적 의례나 축제 때는 평소보다 훨씬 화려한 모자를 착용하며, 이는 해당 여성이 가문 내에서 어떤 의례적 역할을 맡았는지를 드러낸다. 케추아 사회에서의 계층 구조는 단순히 부자와 가난한 사람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생산하고, 분배하고, 의식을 주관하는가에 따라 다르게 작동한다. 이러한 사회적 맥락이 모자의 구조와 장식 방식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결국 이 전통 모자는 하나의 ‘문화적 지문’이라 할 수 있으며, 단지 머리를 덮는 도구가 아닌, 정체성과 계급, 나아가 공동체 의식의 집약체라 할 수 있다.

 

치마에 담긴 색과 층 – ‘폴레라’의 위계

페루 케추아족의 전통의상에서 또 하나의 계층 표현 도구는 바로 여성들의 전통 치마인 ‘폴레라(pollera)’다. 이 치마는 한 겹이 아닌 여러 겹을 겹쳐 입으며, 겹수와 색상, 패턴이 각기 다른 상징을 지닌다. 특히 치마의 겹수가 많을수록 그 여성의 가문이 부유하거나 공동체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부유한 가정의 여성은 5겹 이상을 입기도 하며, 안쪽 치마는 고운 실크에 가까운 소재로 제작된다. 반면 서민층 여성은 보통 2~3겹 내외로 입으며, 겉감은 양모나 면으로 된 경우가 많다. 또한 색상도 중요한 요소다. 붉은색은 활력과 생명을 의미하고, 파란색은 보호와 믿음을 상징하며, 노란색은 축제를 의미한다. 특히 일부 지역에서는 특정 색상의 조합이 특정 마을이나 부족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문양 역시 지역과 계층에 따라 다른데, 어떤 문양은 특정 가문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전유물이기도 하다. 치마의 허리 부분에 달린 장식끈, 벨트 역시 복식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며, 벨트의 패턴과 장식도 그 여성의 출신 배경을 암묵적으로 말해준다. 이렇듯 케추아 여성의 치마는 겉으로 보기엔 아름다운 색과 무늬로 꾸며져 있지만, 사실상 하나의 정교한 '신분 상징 체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마치 중세 유럽의 문장이나 동양의 문패처럼, 눈에 띄지 않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담은 시각적 언어다.

 

페루 케추아족의 모자와 치마의 계층 표현

 

의례와 생존의 방식이 만든 복식 언어

페루 케추아족의 전통의상은 단순히 ‘옷’이 아니라, 케추아족의 삶과 신념, 그리고 공동체 중심 문화가 농축된 상징 체계다. 특히 모자와 치마는 일상뿐 아니라 종교적 의례와 사회적 행사에서 그 상징성이 배가된다. 예를 들어, 특정 축제에서는 치마에 사용된 색상 배합이 신을 향한 경배나 계절 주기를 반영하며, 결혼식에서는 신부가 입는 폴레라의 수와 장식, 모자의 형태가 양가 가족의 사회적 위상을 나타내는 지표가 된다. 여성들이 직접 손으로 짠 천에 수를 놓고 자수를 더해 만들어내는 이 복식은 그 자체로 노동과 헌신의 결정체이자, 자신과 가문, 마을의 문장을 짜는 행위이기도 하다. 더불어 옷감 제작부터 의상 완성까지의 전 과정이 ‘여성의 노동’으로 인식되며, 이는 자연스레 여성의 사회적 위상과도 연결된다. 이와 같은 복식 언어는 외부인에겐 낯설고 복잡하게 보이지만, 공동체 내에서는 서로의 정체성을 읽고 관계를 확인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또한 자연환경이 가혹한 고산지대에서 실용성과 상징성을 모두 갖춘 복식을 유지한다는 점은, 생존과 문화가 하나의 언어로 결합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케추아 사회에서 복식은 단순한 ‘입는 것’이 아닌 ‘사는 방식’을 드러내며, 복식 하나하나에 담긴 규범과 신념은 후대에까지 전승되어 왔다. 이처럼 케추아족의 전통의상은 의례와 생존, 공동체와 신념이 실과 바늘로 직조된 문화적 결과물이며, 그 모양과 색깔, 겹수와 무늬에는 삶의 지도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변화 속의 복식, 그리고 남은 흔적

페루 케추아족의 전통의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안데스 고지대의 일부 지역에서는 일상복으로 사용되지만, 점차 관광 상품이나 전통 행사용 복식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글로벌화와 도시화로 인해 젊은 세대는 청바지나 티셔츠처럼 편리한 현대 의복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으며, 이는 전통 복식의 사라짐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특히 치마의 겹수나 모자의 장식처럼 계층을 시각적으로 구분하는 요소들은 현대 사회의 평등 가치와 충돌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스코나 아레키파 같은 지역에서는 전통 복식 축제나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복장 체험 프로그램이 활성화되면서, 전통 의상에 대한 관심은 이어지고 있다. 박물관과 민속문화센터에서는 케추아 복식의 의미와 역사를 전시하며 보존 활동을 지속하고 있으며, 일부 케추아 여성들은 여전히 자수와 방직 기술을 통해 수공예 시장에서 소득을 얻고 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변화가 단순한 ‘사라짐’이 아닌, 복식이 시대 흐름에 맞춰 새롭게 존재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유럽식 드레스나 중국의 한푸처럼, 페루 케추아족의 전통의상도 이제는 상징적 자산이자 문화유산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치마를 여러 겹 겹쳐 입고, 손수 짠 천 위에 후대를 위한 문양을 새기며, 고산지대의 문화적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오늘도 바느질을 멈추지 않는다. 이 전통 의상은 단지 과거의 유물이 아닌, 문화의 마지막 숨결이자, 미래를 위한 실마리였다. 이와 유사한 계층적 복식 표현은 볼리비아 아이마라족의 폴레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